꽃틔우는 産苦… 들썩이는 한라 ...제주에서 소설가 윤대녕 한반도 남단의 큰 섬 제주는 겨울에도 봄을 품고 있는 곳이다. 쿠루슈 난류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 제주는 봄을 수태하고 있는 여인과도 같다. 그래도 겨울은 역시 겨울이어서 어딜 가도 꽃구경하기 힘들고 태풍주의보를 동반한 북서 계절풍이 자주 몰아쳐간다. 주의보가 발효되면 배들은 항구에 묶여 험한 너울에 서로 부딪쳐 삐걱이고 아이를 둔 사람들은 바깥 출입을 삼간다. 올겨울 제주는 폭설이 여러 차례 내렸다. 몇m씩 되는 눈이 한라산을 뒤덮어 성판악은 물론이고 어리목, 영실에 이르는 길도 교통이 전면 통제됐다. 시내 곳곳에도 눈이 쌓였는데, 사십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눈이 그치고 나서 어리목에 올라가 봤더니 과연 눈이 부셔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겨우내 나는 바다에서 살다시피 하였는데 서해와 남해에서 추자도를 거쳐 내려온 감성돔과 대면하기 위함이었다. 12월 중순에 나는 제주 남해서부 먼 바다에서 첫 감성돔과 조우했다. 그들은 12월에 내려와 주로 추자권에서 머물다 4월쯤이면 다시 완도를 거쳐 북상한다. 그러므로 제주 본섬에서 감성돔을 구경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영등철이 시작되고부터는 북부 해안에서 감성돔을 보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바다 속은 계절이 한 박자 느리므로 사실상 2월부터 겨울이 시작돼 5월이나 돼야 봄이 찾아온다. 이때가 1년중 수온이 가장 낮은 계절인데 이를 영등철이라고 한다. 빗자루로 쓸어놓은 마당처럼 바다에 좀처럼 고기가 보이지 않는다. 저녁마다 빈 배로 돌아오는 어부들은 탄식을 한다. 그런데도 낚시꾼들은 영등철을 기다린다. 주의보 상황이나 야간에 간혹 대물들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물고기에 홀려 땅에서의 겨울을 다 보내고 났더니 어느덧 우수가 지나고 문 앞에 3월이 와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집 앞에 나갔더니 길 건너편 텃밭에 노란 유채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게 보였다. 헛것을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유채꽃이 분명하였다. 2월23일 아침의 일이었고 그 전날도 주의보가 발효된 가운데 밤새 거센 바람이 불었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발바닥이 가렵더니만 그예 또 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 며칠 전 제주에서는 봄의 전령이라 부르는 복수초가 얼음을 비집고 노랗게 피어 있는 사진을 신문에서 내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저 무심히 보아 넘긴 터였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나는 겨우내 가지 않았던 한라산 기슭의 수목원에 올라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미 매화가 만발해 있는 게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굵은 팽나무들 사이에 수선화가 카펫처럼 땅을 수놓고 있었다. 낱그루이긴 하되 여기저기 철쭉까지 피어 있었고 산다화와 동백은 바닥을 물들이며 이미 붉게 지고 있는 참이었다. 바야흐로 천우사화(天雨四花)의 계절이 당도해 있음이었다. 돌아오는 길엔 현무암 돌담에 둘러싸인 푸른 보리밭 앞에 서서 한참을 짐승처럼 서성였다. 육신의 가려움으로 봄은 찾아온다. 조금 무렵의 바다처럼 빛의 맑음과 그 눈부심으로 봄은 또 기어이 찾아온다. 제주는 이렇듯 더운 이불 속에서 서둘러 아이를 생산하는 여인처럼 곳곳에서 꽃을 틔우고 있다. 그리고 꽃들은 등고선을 따라 서서히 북상하여 올해도 반도를 다시 화염처럼 물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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