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곤한 봄햇살이 꽃봉오리 깨우고… 속리산 법주리에서 도종환(시인) 봄비가 맑은 발꿈치로 밟고 간 자리마다 푸릇푸릇한 봄비의 발자국이 찍혔습니다. 뒤뜰에도 발자국, 텃밭에도 발자국, 산등성이에도 발자국, 푸른 봄비의 발자국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여기저기서 나도 봄비가 가뭇없는 발길로 디디고 간 자국이라고 소리치며 솟아납니다. 부화를 기다리는 알들처럼 생강나무 가지 끝에 매달렸던 빗방울들은 나뭇가지를 뚫고 들어갔다가 그 자리로 다시 꽃들을 끌고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빗방울 매달려 있던 자리마다 노랗게 꽃으로 몸을 바꿔 앉아 있습니다. 도심에서는 벌써 산수유나무꽃이 만개했는데 산 속에서는 먼저 피어야 할 생강나무꽃이 이제서야 피었습니다. 감미로운 입맞춤 끝에 살 가까이 번져오는 사랑하는 이의 따뜻한 기운처럼 산벚나무 여린 가지 끝을 쓰다듬던 봄 햇살은 수백 개의 꽃봉오리 위에 노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곧 터져 오를 것 같습니다. 소리 없는 함성. 그렇습니다. 곧 터지고 말 것 같은 꽃봉오리는 소리 없는 함성입니다. 나는 그 산벚나무 꽃봉오리 곁에서 말하라, 소리쳐라, 외쳐라, 하고 말합니다. 자두나무 꽃봉오리는 첫돌에 켜는 작고 가는 한 개의 촛불 같은 꽃들을 켜고 앉아 있습니다. 나는 압니다. 손에 촛불을 든 사람들의 마음을. 횃불이 되어 불 지르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촛불로 바꾸어 든 사람들의 마음을. 산불처럼, 들불처럼 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고 다독여 촛불 하나로 바꾸어 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의 불길을 기도의 온기로 바꾸어 우선 내가 밝힐 수 있는 만큼의 빛으로, 내가 물리칠 수 있는 만큼의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성숙해지는 열정을. 그런 마음들의 뜨거운 온기가 법주리 이 외진 산골짝까지 번져와 버들개지를 깨우고 자두나무꽃을 피우고 백목련 입술을 열게 합니다. 꽃봉오리마다 맺혀 있는 소리 없는 함성과 희디흰 불꽃들이 산에 거리에 만개하는 세상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아침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더니 농사걱정에 몸이 단 후배들입니다. 목장에 들러 거름을 얻어 가지고 오겠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고추밭에 박혀 있던 해묵은 말뚝들을 뽑아냈습니다. 벌써 밭에 거름을 낼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랜 세월 썩고 썩어온 것들 중에 그나마 거름으로라도 쓸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거름으로 삼아 채소와 곡식을 가꾸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는 것들은 분리해서 폐기하는 나라농사를 시작하는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지난 폭설에 허리가 부러진 낙락장송들이 그대로 쓰러져 있지만 산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산꿩의 헌걸찬 울음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쭈뼛하며 고개를 돌리는 아기 다람쥐의 모습이 앙증맞습니다. 오늘 점심은 사과나무 밑에 돋아 오른 돌나물을 무치고 밭둑에서 캐온 냉이로 국을 끓여서 함께 나누어 먹겠습니다. 냉이 향이 가시기 전에 그대가 오신다면 나무탁자 위에 숟갈 하나 놓을 자리 남겨 놓겠습니다.


쑥쑥몰
체험이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