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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 홍현주
  • |
  • 2007-12-20
2

 

내 자신이 참 가증스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수도 워싱턴행 비행기에서 생긴 일입니다. 제 옆에 베트남 가족이 있었습니다. 제 자리에 잘 못 앉아있어 비켜달라 하려는데 의사소통에 실패, 손을 내저으며 밀어낸 격이 되었습니다. 아주 양순하고 고운 사람들로 부부가 30대 중반 쯤 돼보였어요. 그런데 옆에 있는 베트남 사모님이 그 좁은 좌석 아래 가방을 두 개 놓아 공간이 없으니 자꾸 내 쪽으로 다리를 뻗지 않나, 팔걸이를 넘어 팔로 자꾸 저를 건드리지 않나.... 왜 그렇게 싫은지요. 마치 내 구역 침범당하는 맹수마냥 그 사모님의 숏다리가 건너올 때 마다 나의 롱다리로 매섭게 밀쳐냈다니까요. 저요? 성경책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느꼈습니다. 단지 영어를 못 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이들을 무시하고 있구나. 차림새나 매너로 보아 경제적 여유도 있고 무지몽매한 사람들도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저의 천박한 우월감이 자꾸 새어나오는지 13시간 내내 숏다리의 침범이 싫은 내 자신도 싫었습니다. 이럴 때 문화적 차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마 그들은 생면부지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저만큼 꺼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게 피해를 주는 일이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저의 우월주의는 차츰 측은지심으로 변해가더이다. 식사가 나와도 선택을 할 수가 없고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저더러 “Excuse me." 한 마디 힘들어 제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더군요. 식사나 간식이 나올 때마다 저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껍질을 까서 속을 보여줘가며 음식을 고르도록 해주었습니다. 멀미를 하는 아주머니는 음식도 잘 못 먹었어요. 비행기 안에서 작성해야 하는 입국서류와 세관신고서가 있는데 영어가 ‘꽝’이니 저 사람들 어쩌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인솔자가 있어 작성해 주려니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도착해 이민국을 통과하면서 벌어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내국인, 즉 미국인들이 통과하는 곳에 서있었던 겁니다. 저는 소지품이 간단해 다른 사람보다 일찍 나와 그네들이 그리로 간 줄 몰랐어요. 입국 서류도 미리 작성하지 못한 듯 했습니다. 매몰찬 한국계 공항직원이 이들을 밀어내 외국인 줄 끝으로 보냈는데, 그 말은 그 때부터 다시 1시간도 더 기다려야한다는 뜻입니다. 미국 관리들은 행동도 느린데다 워싱턴 공항은 외국인의 경우 열손가락 지문을 찍거든요. 멀미로 서있기도 힘들던 가녀린 베트남 아주머님이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가슴이 아픕니다. 나는 왜 저 사람들이 나와 같이 나왔으니 순서를 내 앞으로 해주라는 말을 못 했는지 지금까지도 얼굴이 화끈 거립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으니 제가 가증스럽습니다.


에피소드가 길었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고맙다는 점입니다. 공교육이 수많은 비판을 받더라도 일단 우리나라 영어교육 역사가 50여년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라에서 국민에게 영어공부를 시켜줬고 그래서 우리가 영어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게 50년이란 뜻입니다. 외국을 드나드는 30대 한국인 중에 영어가 그 정도로 ‘꽝’인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말이 안 되도 최소한 줄 서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들을 수 있고 입국서류 정도는 오래 들여다보더라도 읽고 쓸 수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진 건 없어도 수년전 보다는 요즘이 영어학습 환경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영어에 대한 부담감이 심해져서 그렇지 마음먹으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길은 참 많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방과후 영어수업도 질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시 교육청 장학관들과 교수님들이 공조하여 좋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교육도 차츰 나아지리라 기대합니다.


갑자기 애국자가 되는 기분입니다만 저는 진짜 애국자가 되기로 궂게 결심했습니다. 저도 젊어서는 미국서 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십여년 드나들다보니 자꾸 정나미가 떨어집니다. 비나 눈만 심하게 와도 전기 끊기기가 다반사요, 인터넷은 왜 그렇게 느린지, 병원 한 번 가면 처방전도 안 주면서 십몇만원 씩 청구합니다. 뭐 검사라도 한 번 했다간 병원비로 거덜 납니다. 보험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병 다 나을 때까지 내 부담금이 100불 가량 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에서 보험이 없는 국민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대한민국 의료제도는 세계최고요, 대한민국 의사들 실력은 만만세 올시다. 이 답답한 미국과 의사소통하기 위해 우리 아이들이 학원으로 과외방으로 내몰리고, 그 착한 베트남 가족들이 면박을 당하다니 울화통이 터집니다. 아, 난 정말 영어가 싫습니다!!


영어교육박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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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랍슨
  • |
  • 2012-09-0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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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선생님.. 너무 존경합니다...

오전부터 짬짬이 박사님 칼럼을 하나씩 읽어가고 있는데요..

박사님의 빅팬이 될것 같네요.

박사님 저도 영어가 참 싫습니다 !!

 

고등학교 영어교사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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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우맘
  • |
  • 2009-03-24 18:55
답댓글

ㅎㅎ

가끔 외국 여행 갈 때 제일 무서운 곳이 공항 입국 심사대지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리 떨리고 무서운지...

암튼, 영어로 말하지 못하는 저는 그 사람들 일이 꼭 제 일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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