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왜소한 3학년 남자 아이는 의자를 뒤로 젖혔다가 책상 옆으로 누웠다가 머리를 헝클었다가 하면서 좀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이제 막 상담을 시작하려는데, "언제 끝나요?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요?"라고 물었다.
다행히, 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끝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야. 네가 하기에 따라 길어길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지."
아이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빨리 끝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은 모양이다.
아이에게,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인지, 언제 제일 기분이 좋은지, 언제 가장 속상한지, 친구는 누가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아이 엄마가 가져온 유아용 드릴 학습지와 교과서를 살펴보았다.
학습지에는 '9-2, 10-2, 10-3,...'의 문제가 한쪽에 10개씩 들어있었다.
"음...일단 이거부터 한 번 풀어볼까?"
아이는 책상에 엎어지며 징징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아...머리가 쪼개질 것 같아. 아, 너무 어려워, 너무 어려워!!!"
"별로 안 어려워. 한번 해 봐."
아이는 '9-2' 문제를 보면서 "5 빼기3?"이라고 읽었다.
"아닌데? 숫자를 다시 잘 봐봐."
"이아...어려워서 못하겠어요. 제 뇌는 호두만해서 이렇게 어려운 문제는 못 푼다고요."
"정말? 근데 자꾸 풀다보면 뇌가 수박만해질껄?"
나는 커다란 수박 모양을 만들면서 말했다.
그 말에 아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내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세면서 하면 안 어려워."라며 손가락으로 시범을 보이지 아이가 마지못하다는 듯 자신의 양 손가락을 쫙 폈다. 그리고는 "8?"이라고 했다.
"10-2가 아니고 9-2인데? 그럼 9부터 시작해야지?"
아이가 손가락으로 9을 만들고 하나씩 접어갔다.
"7?"
"맞았어."
"근데 이거 다 풀어야 해요? 아아....머리가 깨질 것 같아."
"잘 생각해서 풀어봐, 이거 다 풀면 끝내 줄게."
"정말요?"
아이는 서둘러 손가락을 펴더니 하나씩 풀어 갔다.
10개의 문제 중에서 한 문제를 틀려서 다시 풀게했다.
"다 맞으면 끝내주려고 했는데 1개 틀렸으니까 좀 더 해야겠다."
나는 아이에게 구구단을 외울 수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잘 못 외운다고 했고, 7*7을 묻자 엉뚱한 수를 대었다.
"7 곱하기 1부터 해보자."
"칠일은 칠, 칠이는....모르겠어요. 아아...언제 끝나!!!"
"7에다 7을 더해 봐, 아까처럼 손가락으로 해도 돼."
"끄응...(손가락을 세어서) 14."
이런 식으로 해서 7단을 마쳤다.
"좋았어! 천천히 하니까 구구단도 할 수 있지?"
그렇게 해서 아이를 달래가며 5단, 10단, 9단, 6단, 8단을 했다.
구구단을 하고 나서 이번에는 아이 엄마가 가져 온 3학년 수학 교과서를 펼쳤다. 교과서에는 중간 중간 풀다 만 흔적들이 있었다.
"구구단도 했으니까 이번엔 123*3. 이것도 한번 풀어볼까?"
아이가 세로셈으로 문제를 쓰고는 못 풀겠다고 했다.
"123을 3번 더하면 되잖아."
나는 가로로 123+123+123이라고 썼다. 이번에는 아이가 쉽게 풀었다.
그렇게 받아올림이 없는 몇 개의 문제를 풀고 나서, 이번에는 받아올림이 있는 문제를 풀게 했다.
그런데 아이가 "이거 할 줄 알아요."하더니 받아올림 표시를 하는 게 아닌가?
"어? 정말? 할 줄 알았네?"
신기한 일이었다. 아이는 짜증을 내지 않고 있었다.
교과서에서 풀다 만 문제들을 마저 다 풀고, 아이 엄마를 불렀다.
아이 엄마에게 방금 아이가 푼 문제들을 보여주자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이에게 "엄마 앞에서 한번 풀어 볼까?"하면서 문제를 내 주었다.
아이는 잘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듯 긴장한 모습이었고, 멋지게 보여주려고 하다가 한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자 아이가 울먹거렸다.
"괜찮아. 천천히...천천히 해."
그렇게 문제를 다 풀고 아이를 내 보냈다.
아이 엄마는 밖에서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제가 나오자마자 이 방에서 아이가 분명 소리소리 지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늘 그랬거든요. 저랑 공부하던지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던지...그런데 비명 소리가 안나는 거에요. 처음이었어요."
나는 웃으며 아이 엄마에게 아이를 진단한 결과를 말했다.
"아이가 완벽주의인 것 같아요. 성격이 매우 급하구요."
"네? 애정 결핍이다, 산만하다 그런 말은 들었지만 완벽주의나 성격이 급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데 성격이 급하다보니까 서두르다 실수를 하고 그 실수에 본인이 실망을 해서 지레 포기하고...그랬던 것 같아요. 수학은 특히 집중력이 필요한데, 생각을 한 곳에 모은다는 게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잖아요? 그 에너지가 모아지기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자꾸 포기하는 것 같아요. 지능엔 전혀 문제가 없어보이구요. 지능에 문제가 없으니까 수학을 못할 이유도 없지요."
"정말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가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가 해 주는 음식이 맛있다고 하니까 맛있는 음식을 보상으로 주세요. 공룡 좋아하니까 공룡 모형을 사 주셔도 좋고. 이 또래 남자 아이들에게 아무 댓가없이 무조건 잘 플어라라고 하는 건 좀 가혹할 수 있어요. 아이가 좋아하는 칭찬이나 먹거리, 장난감 등을 보상으로 주는 것도 공부할 맛이 나게 할 수 있죠. 무엇보다,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아이가 집중할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 해요. "
"그것만 하면 될까요?"
아이 엄마는 몇 학년 수학부터 복습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 아이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요. 이런 아이들은 복습보다는 예습이 좋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자신을 많이 비교하는 편인데 자기 혼자 1,2학년 수학을 한다는 것이 마음이 들지 않을 거에요. 앞으로 배울 내용 중에 어려운 단원(분수)는 빼고 그 다음 한 단원을 중심으로 예습을 시켜 주세요. 그러면 학교 수학 시간에 소외감을 덜 느낄 거에요."
하지만 아이 엄마는 걱정스러워했다.
"9-2가 안 되는 아이인데...예습을 할 수 있을까요?"
"아이가 9-2를 못한 것은 생각을 아예 안 해서 그런 거에요. 생각을 하면 풀 수 있어요. 반복해서 한 자리 수 뺄셈 문제를 풀게 한다고 해도, 본인이 생각을 안 하려고 마음 먹으면 절대 풀 수 없어요. 하지만 아이가 마음만 먹으면 곧 풀 수 있어요. 아이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잘구슬려서 하게 하면 돼요~^^;;"
아이 엄마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아이 엄마에게,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되도록 직접 지도하라.'고 해 주었다. 그래야 아이 특성을 더 잘 알게 되고 아이와 더 가까와 진다고...
아이가 엄마를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여러 아이들을 상담하면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자기 엄마를 매우 사랑한다.'는 걸 느꼈다.
그 사랑이 외면받을 경우에 미움이 커지는 것이리라.
원래 아이들은 자기 엄마를 정말 참 많이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