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술 먹고 12시 다 되어 집에 들어갔더니 승호 엄마는 굉장히 슬픈 특집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주제는 가족이 옆에 있을 때 잘 하시오 같더군요) 승호는 옆에서 눈감고 자는 척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옆으로 갔더니 승호가 키득키득 웃습니다. 승호 엄마가 "너 지금 우니? 웃니?" 하고 물으니까 웃는 소리가 더 커집니다. 제가 "승호야.. 아빠 왔다.." 하니까 눈을 뜨네요. 벽에 보니까 못 보던 그림이 붙어 있길래 이게 뭐냐고 했더니 승호가 그린 그림이랍니다. "뭘 그린걸까?"하고 제가 자세히 보기 시작했더니 승호가 벌떡 일어나 뛰어 옵니다. "이건, 구름과 비, 이건 햇님, 그리고 땅 밑에 이건 개미집, 그리고 승호와 아빠 또는 엄마" 하고 설명합니다. 사람을 두 명 밖에 안 그렸더라구요. 그래서, 자기 기분에 따라 엄마가 되었다가 아빠가 되었다가 하나 봅니다. 그나저나, 술 기운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띵 합니다. pop it in the pocket animals pop it in the pocket at the beach pop it in the pocket clothes pop it in the pocket market day pop it in the pocket things that go pop it in the pocket toys 여기 쑥쑥 회원분들은 위에 열거한 책들이 뭔지 잘 아시죠? 게시판 수상자로 뽑히게 되면 선택할 수 있는 선물 목록 중의 하나인 Pop it in the pocket 시리즈입니다. 물론 6권을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중에서 3권만을 받게 되지요. 3권이면 어떻습니까? 선물 받는 것만 해도 어딘데요. 제가 11월 수상자로 선정되고서 승호가 직접 선택한 선물이 바로 이 책들이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승호는 자동차가 그려져 있는 pop it in the pocket things that go 책을 보자마자 결정을 해버린거죠. 그런데 3권을 수상자가 임의로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중에 승호가 원하던 그 책이 안 오면 어찌하나 걱정이 되어 운영자님께 슬쩍 부탁을 했었거든요. 다른 것은 몰라도 웬만하면 things that go를 보내주십사 하고요. 승호는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매일 언제 선물이 오냐고 물었습니다. 그 당시 쑥쑥의 개편 때문에 엄청 바쁠 것 같아 전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승호에게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선물이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습니다. 사실 이번에 제가 처음으로 공부를 위한 도구(껄껄..)를 쑥쑥에 신청했습니다. 그 게임 CD있죠? 토끼가 나오는 거.. 저나 승호 엄마가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면 승호가 옆에 와서 자꾸 간섭을 하길래 이제 좋은 CD를 소개시켜 주어야할 때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쑥쑥에서 CD 공구를 하지 뭡니까? 그래서 그냥 신청했던 것입니다. 신청하고 보니 CD가 세 장이라고 하더군요. 세 장을 한꺼번에 보여주면 승호가 집중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승호 엄마에게 택배가 오면 풀지 말고 놔두라고 부탁했거든요. 조용히 제가 풀어서 한 장만 보여주려구요. 집에 갔더니 승호 엄마는 그 공구가 왔는 줄 알고 선물을 풀지 않고 제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저도 풀어보기 전에는 그것이 공구인지 선물인지 잘 몰랐습니다. 전 떨리는 마음으로 포장을 풀었습니다. 흐흐흐.. 그 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책 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권의 책도 남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선정해서 보내셨더라구요. 어떤 책이 왔는지 궁금하시다구요? pop it in the pocket animals pop it in the pocket things that go pop it in the pocket toys 이렇게 세 권입니다. 저는 승호가 과연 이 책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습니다. 겉 포장지를 뜯었더니 안에 이사할 때 많이 쓰는 공기가 들어가 있는 비닐이 한 번 더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인터넷에서건 오프라인에서건 쇼핑을 잘 안 하기 때문에 포장을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세심한 포장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비닐까지 들고 마루에 나가서 승호에게 책이 왔다면서 보여주었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승호가 제 손에 들려있는 것들을 떡 보더니 책 보다도 그 포장 비닐을 먼저 받아서는 톡톡 터뜨리고 노는 것 아닙니까?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물론 잠깐 동안만 놀고 나서 책을 받아가긴 했지만요. 역시 아이는 아이입니다. 승호는 책장을 마구 넘겨 보더니 금방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이 어떤 형식인지 아시는지요? 가령 비행기 그림이 있으면 거기에다가 비행기를 꽂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승호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요, 승호는 things that go와 animals는 그 자리에서 다 해치웠는데 의외로 toys는 겉표지만 보고는 더 이상 안 보는 거에요. 이건 진짜 의외의 결과입니다. 장난감 그림을 별로 안 좋아하다니.. 승호에 대해 아직 우리 부부가 잘 모르고 있는 면이 있나 봅니다. 심지어 승호는 toys를 처제네 아이에게 선물로 주라고 그랬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발끈했지요. "승호야.. 아빠가 그리 고생해서 선물 받았는데 그걸 놀지도 않고 그냥 준다고?" 그랬더니 잠잠합니다. 하지만, toys를 가지고 놀 기색은 여전히 안 보입니다. 선물이 도착하기 전에는 왜 아빠가 선물을 안 받고 자기가 선물을 받느냐고 미안해하던 녀석이 이렇게 돌변할 줄이야.. 책이든 비디오든 아이에게 사 줄 때는 아이의 성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원하는 것만 사주게 되면 조잡하고 수준 낮은 것들만 모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부모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 성향에만 맞추어 물건을 사게 되면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지 않게 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옆에서 이 사태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승호 엄마가 끼여듭니다. "승호야.. 그럼 엄마한테 선물로 줘." "그래, 나 이 책은 엄마에게 선물로 줄래.. 그리고, 이 두 개는 내가 갖고.." "승호야, 아빠는? 아빠한테도 한 권 줘야지.." "아빠 것은 없어." 이런, 이런이런이런! 이렇게 배신을 때리다니... 제가 아무래도 헛살았나 봅니다. 그런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네요. 어쩌겠습니까? 자식인데.. 승호는 아직까지 책을 읽을 때 영어로 말하면 가끔씩 항의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엄마까지 옆에 앉아서 영어로 이야기를 시도했더니 반항을 하더군요. 사자를 들고 '사자가 어디 있지' 하고 승호가 찾고 있으면 저나 승호 엄마가 below a zebra하는 식으로 도와주었거든요. 그러자, 승호는 "영어로 하지마" 하면서 일부러 기린에다가 꽂아 놓고는 통쾌한지 웃곤 했습니다. 요즘 승호의 청개구리식 반항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온 가족이 함께(그래봐야 셋이지만요) animals를 보다가 가벼운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책의 한 페이지에 동물 네 마리가 있었고 'Which animal roars?' 라는 질문이 있었거든요? 승호 엄마가 그 부분을 읽어 주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roar가 뭐냐는 거에요. 전 승호에게 "승호야.. 너 기억나지.. where the wild things are에서 괴물들이 roar하잖아.." 하고 기억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승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네 마리의 동물 중에서 "사자" 하고 답을 가려냅니다. 그런데, 승호 엄마는 여전히 "근데 roar가 뭐야?" 하고 묻습니다. 전 그제서야 승호 엄마가 진짜로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약 올렸죠. 승호도 아는데 모른다구요. 사실, 저도 'The very hungry caterpillar' 같은 책을 승호에게 읽어줄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평생 caterpillar니 cocoon이니 하는 단어 몰랐을 것입니다. 아직 'where the wild things are'를 비롯하여 영어 동화책 읽을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던 승호 엄마에게는 'roar'라는 단어가 생소한 것이 당연하겠지요. 평소에 그런 단어 쓸 일이 어디 있어야 말이죠. 그런데, 애 앞에서 제가 승호 엄마의 자존심을 긁은 것입니다. 승호 엄마의 눈빛이 수상해지더니 당장 반격이 시작되더군요. 뱀이 있길래 전 그걸 영어로 읽었죠. 'snake'라고요. 승호 엄마가 그걸 듣더니 승호에게도 이게 뭐냐고 다시 묻습니다. 승호가 대답합니다. 'snake!' 그런데, 그 발음이 너무나 훌륭합니다. 승호 영어 발음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인데 이건 달랐습니다. 거의 원어민 수준의 발음이더군요. 기다렸다는 듯이 승호 엄마가 이럽니다. "아유.. 승호가 아빠 보다 훨~~씬 잘 하네.." 승호 엄마는 승호의 snake 발음이 특히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은 언제 파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칭 승호의 영어 스승인 저도 모르고 있었는데요. 결국 그 날은 비겼습니다. 저와 승호 엄마의 힘겨루기가요. 보통 영어로 말할 때 우리말과 영어를 섞어서 쓰지 말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위에서 제가 썼던 표현처럼 'where the wild things are에서 괴물들이 roar하잖아' 이런 식의 표현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더라구요. 일단, 제 입에서 영어로 말이 잘 튀어 나오지 않고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해도 승호에게 어떤 답을 듣기를 원할 때는 승호가 질문을 이해하도록 해야하는데 영어만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이지요.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염두에 두고 미리 준비를 해야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을 할 수 있을텐데 그게 어디 쉽나요? 집에 와서 놀아주기만도 바쁜데요. 참, 어려운 일 같습니다. 승호 아빠 : [email protected] (승호는 97년 3월생 남자아이로 01년 9월초부터 집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덧붙임) 너무나 달게 먹은 밥. 그런 기억이 있습니까? 1994년 이맘 때였을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제가 도모하던 일을 실패로 마감한 후 마음을 정리하고자 설악산 등반에 나섰습니다. 전문적으로 산을 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저 혼자 그렇게 하기는 어려웠을텐데 후배 한 명이 동반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후배가 먼저 가자고 했지요. 그 후배도 동시에 좌절을 맛 본 터라.. 그 때까지 설악산 아래에서 놀아 본 경험은 많지만 설악산 정상에 올라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큰 배낭을 메고 2박 3일의 일정으로 백담사 계곡에서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배는 등산 경험이 많아서 별로 안 힘들어했는데 저는 무지 힘들더군요. 게다가 찬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참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정상은 보이지도 않고 정말 그대로 꼬꾸라지고 싶더군요. 몸은 으슬으슬 떨려오고 배는 고프고 말이죠. 그 때, 조그만 규모의 절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저희는 부탁을 했습니다. 따뜻한 밥 좀 먹을 수 있겠느냐고요. 일하시던 보살께서 미역국이랑 밥이랑 선뜻 내주시더니 방에서 먹고 가라고 하더군요. 따뜻한 방에 앉아 옷을 말리며 미역국에 말아 먹었던 그 밥 맛과 비 내리는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 뭔가에 실패했다는 쓰라림이 녹아 없어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산천에 태어나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게다가 대청봉 정상에 오르니 내리던 비는 그 해의 첫 눈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악산 첫눈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첫 등정에 그런 기회를 갖게 되다니요. 일면 겁도 나긴 했지만 아침에 산장 문을 열고 나와 본 설악산의 눈 덮인 모습 또한 장관이었지요. 전 그 이후로 자주 가지는 못해도 설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설악산 단풍 구경가서 좋다! 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얼마 전, 설악에 첫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 때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설악에 첫 눈 오는 날에는 꼭 대청봉을 오른다는 산장에서 만났던 어떤 교수님 생각도 나고요. 이번에도 가셨을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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