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에는 뭐든 잘 기억하고 똑소리나게 잘 챙긴다고 어른들께 '똑순이'란 소릴 듣곤했었죠. 대학 다닐 때는 엄마가 뭘 깜박하거나 어이없는 실수를 한다고 주제넘게 퉁을 주기도 했었는데 전 천년 만년 그대로일 줄 알았는가 봅니다. 회사 다니던 시절부터 기억력이 약간씩 떨어지더니 결혼하고 애 둘 낳고 나서는 '내가 왜 이러지?'싶을 정도의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게 되더군요.
더 이상 냉장고에 전화기를 넣어두는 일이 '~했다더라...'는 남의 일이 아니고 매번 긴장을 하며 가스밸브나 대문을 잠갔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현재의 모습에 저 자신이 깜짝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일을 챙길 때와는 달리 남편이며 아이들 일 하나 하나를 다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위로를 하고 싶어도 서글픈 게 현실이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엄마한테 싫은 소리했던 걸 가슴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형규나 재영이가 좀 커서 이런 엄마한테 좀 잘하라고 가르치려 든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을 해보기도 하구요.
2002년 새해가 밝은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4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네요.
아이들 커 가는 것 보면 '시간'이라는 단어를 한번 더 떠올려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만큼은 더더욱 기억에만 의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놓칠 수 없는 , 시간 속에 묻혀 그냥 사라져버리기에는 아까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건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똑같이 가지는 마음일거예요.
그래도 사진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간략히 때와 장소, 그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을 적어 넣기도 하지요.
전 셔텨를 누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글로 담아 아이와 함께 한 소중한 시간을 뒤돌아봅니다.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어제와 오늘의 아이는 분명 하루라는 시간만큼 성장해있고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또 내일의 모습을 이뤄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출생 시간과 출생 시 신장과 체중 등으로 시작되는 개인의 역사.
육아를 하면서 언제 엄마랑 처음 눈을 맞추고, 옹알이를 시작했는지, 몇 개월에 뒤집고, 앉고, 기고, 서고, 걸었는지, 어떤 행동으로 엄마를 행복하게 하고, 때로는 당황하게 했으며, 좋아하는 장난감과 책, 음식은 뭔지 꾸준히 기록해 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더라구요.
아이가 말을 하고 엄마랑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기록해두고 싶은 게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런데 밤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때쯤이면 벌써 기억 저편으로 넘어가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간혹 잊고 싶지 않은 건 바로 메모를 해두기도 하지요.
형규가 30개월된 무렵부터는 한 사이트의 서비스를 이용해 형규와 재영이의 일기를 써오고 있습니다. 워낙 악필이라 제가 쓴 글을 제가 들여다봐도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기도 하지만 분실 염려없이 오래 소장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인데 혹시 그 사이트가 중간에 문을 닫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PC 하드에다 저장을 해두고 있습니다. 명절이나 특별한 일로 집을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당일의 육아일기를 미뤄두지 않는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는 하는데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 씩 PC앞에 앉아 있다보면 왜 그렇게 잘 떠오르지 않는 게 많은지 어떨 땐 그냥 다시 노트 한 권 준비해 거실이나 주방에 두고 적고 싶은 걸 그 때 그 때 쓰는 게 낫지 않을 까 싶기도 합니다.
그 인터넷 사이트에 육아일기를 쓰면서 개월별로 아이의 키, 몸무게. 발 사이즈를 기입해 그래프로 한 눈에 성장곡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percentile로 현재 같은 월령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어느 그룹(키가 큰 편인지,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지 등)에 속하는지를 볼 수 있는데 키를 나타내는 점이 늘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형규와 달리 거의 맨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영이를 보면 속이 상하기도 하지요.
입이 짧아 잘 먹지 않는데도 크고, 남자아이치고 말도 굉장히 빨랐던 형규, 그에 비해 잘 먹는데도 크지 않고 평균적으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말이 빨리 트인다는 데도 굉장히 말이 느린 재영이. 같은 뱃속에서 나왔지만 참 많이 다릅니다.
근래에 제가 적고 있는 육아일기의 내용을 보니 대략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날 있었던 일 중 가장 특징 있는 일과 새로운 경험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가서 있었던 일이나 봄나들이를 한 내용일 수도 있고 아파 끙끙 앓은 일들이 포함되지요. 그리고 처음 해 본 일에 대한 반응과 관심도도요.
제가 1인칭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가끔씩 아이관점에서 아이의 눈과 입을 대신해 쓰기도 합니다.
같이 본 책이나 비디오, 씨디롬 목록과 그 때 오간 대화 중 기억하고 싶은 것
제가 고르거나 아이가 직접 고른 책과 비디오를 함께 하다 보면 아이가 보이는 반응과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걸 토대로 아이가 무얼 보고 느끼는 지 , 어떤 의구심을 가지는지 들여다보고, 이해를 못하는 부분을 다음 번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활용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책이나 비디오, 씨디롬에 대한 선호도는 끊임없이 변하므로 특정 시기별로 아이가 제일 아끼고 좋아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한 눈에 꿰어볼 수도 있고 그걸 보완해주기 위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처음 말한 단어나 문장
만 두 살 터울의 동생을 봐 29개월에 유치원을 다녀야했던 형규, 30개월 정도부터 조금씩 영어책을 보여주며 영어를 접해줬는데 첫 문장으로 한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유치원에 다녀와 집에 들어서면서 "재영 is sleeping?"이라고 했지요.
그 외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부가의문문을 처음 사용했을 때입니다.
엄마가 자주 사용했던 말이나 비디오에서 봤던 내용의 문장이나 그 문형을 그대로 이용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빠뜨리지 않고 적습니다.
이미 습득해 꺼내어 사용할 줄 아는 문장을 조금씩 변형하거나 확장해 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잘못된 행동과 그걸 꾸짖은 야단
괜한 고집을 부리며 울기도 하고 "싫어"를 외치며 막무가내로 행동하기도 하는 아이에게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넘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아주 많습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그 때 아이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 좀 더 인내를 가지고 설득하거나 달래 걸 지나치게 혼낸 것은 아닌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한번 반성해봅니다.
형규는 유치원에 가는 시간 외의 시간을, 재영이는 온 종일 엄마와 함께 보냅니다.
그런데 아이가 커서 학교에 가고, 점점 집에 있는 시간보다는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면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이의 모습을 볼 기회가 줄어들게 되겠죠.
그 때 이 일기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는 고리가 되어준다면 마음이 푸근해지지 않을 까 싶습니다.
---작성일 2002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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