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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사다주신 English 900

  • 홍박샘
  • |
  • 2009-12-22
46

골목을 한참 걸어 마당이 넓은 집에 살았더랬습니다.

김광균 시인 말마따다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구겨진 길이었죠.

우리 집은 입구에서는 약간 멀고 그렇다고 길 끝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어요.

그 골목이 주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골목이 깊으면 가난도 깊어라.

우선 시장, 버스 정류장 등 인근 편린 시설에서 멀다는 뜻입니다.

요즘도 역세권이니 해서 전철서 가까우면 집값이 비싸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집은 가난이 염치 없이 드러나던 골목 중간,

나름 그리 비참하지도 그렇다고 잴 것도 없는 삶을 뒤집어 쓴 곳이었죠.

 

딱 2년 살았답니다. 그런데도 저의 유년의 기억은 다 그 집 마당에 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던 배꽃, 앉은뱅이 과꽃, 맨드라미, 사루비아....

제가 아는 꽃이름은 거기서 배웠습니다.

그 집을 뒤로 저는 마당을 못 가져봤습니다.

집에서 세를 받아야한다고 마당 없이 휑하게 건물을 지어 이사 다닌 탓입니다.

이사를 다닐 때 마다 역에서 조금씩 가까워졌지요.

그건 형편이 점점 나아진 뜻이며 추억은 점점 황폐해진 의미입니다.

 

가끔 골목 입구에 있던 후추공장 냄새를 기억합니다.

후추를 전문적으로 빻는 곳은 냄새가 지독합니다.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발검을을 재게 하고 숨을 끊었어요.

지금도 수영은 못 해도 숨은 잘 참으니 그 때 훈련한 덕입니다.

그 긴 골목을 바퀴달린 큰 가방을 달달달달 굴리며 제 아빠가 오십니다.

아빠는 후추냄새를 어찌 피하셨을까?

 

우리 아버지는 원조 기러기 아빠입니다.

지방에서 일하시면서 한달에 한 두번 집에 오셨어요.

가방은 제게 시집도 꺼내주고, 일제 녹음기도 내며 영어회화 테이프도 싣고옵니다.

당시 최신 영어회화책 English 900. 녹음기는 그림만큼 구식은 아닌데 사진이 없네요.

제가 초등3-5학년이었으니 1970년대였지요.

오빠를 위해 사오셨대도 중학생이 영어회화를 알게 뭡니까?

오빠더러 헤드폰 씌워주고 영어 들으라니 죽을 지경인가보대요.

 

 

그 덕은 제가 봤습니다.

테이프 60개를 수 년간 보관했다가 제가 대학생 되어서 다 들었어요.

스크립트 없이 듣고 - 보고 듣고 - 외우고 - 말하기를 반복했어요.

혼자 힘으로 안 되어 나중에 오빠 친구들이랑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1년에 걸쳐 했습니다.

그리고 독해책 몇 권의 지문을 몽땅 외웠어요.

이듬 해 100명 응시자 가운데 5명 뽑는 학생 통역으로 뽑혔습니다.

 

살다보니 이런 얘기할 기회도 있군요.

듣기 붐과 리더스 읽기에 열심인 쑥쑥맘들께 먼저 그 길을 간 제가 수다 겸 떠들었습니다.

아이들 많이 듣고 읽게 하세요. 더 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아참,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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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소월
  • |
  • 2009-12-28 12:46
답댓글

저도 엄마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카셋트.... 가 떠오르네요.

학생 때 6시에 알람 맞춰서 라디오 방송을 듣던 때도 생각나고 박사님 덕분에 옛기억이 하나씩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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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마레
  • |
  • 2009-12-28 10:48
답댓글
저는 1남3녀 중 막내인데요..글쎄..영어카세트테입 당시 5만원? (중학생이었으니 지금으로 부터 25년도 넘었네요 ^^;;) 정도 하는 것 좀 사달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큰언니부터 오빠까지 영어 테입이며 전집 다 사줬더니 하지도 않고 먼지만 쌓이더라.." 이러시더라구요..아 서러워라..해봤더니 별거 아니더라는 경험에 의한 확신을 뒤집을 만큼 저두 간절하진 않았던지..그냥 오빠가 듣던 정철 카세트 테입을 나름 열심히 듣던 생각이 납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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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시인
  • |
  • 2009-12-26 21:44
답댓글

와~ 어디서 이렇게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 사진을 구하셨나요?

저도 옛추억이 떠올라서 귀에 꽂고 다니던 워키토키(?)라고 기억 어렴풋한 지금의 어학기이자 카세트 플레이어를 찾아보니 없던데요...

저는 지금 생각하면 원수처럼 밉다고 생각되었던 민병철씨와 인연이 깊습니다.

새벽같이 (6시로 기억납니다) 엄마가 깨워 TV앞에 앉혀두고 민병철씨의 새벽 방송을 듣게 하셨던...

그 와중에 같은 시간대에 하는 라디오 영어방송을 차마 놓칠까 방문밖 카세트플레이어로는 녹음을 뜨고 계시고.. 그런 열정에 게으른 딸네미라 기대만큼은 못컸던게 자뭇 죄송스러울뿐... ^^;;

그저.. 새벽마다 날 괴롭히는 민병철 아저씨는 아프지도 않나 투덜거리기나 했죠.

박사님 덕분에 옛추억이 아련하게 생각났습니다.

그립기는 하나, 되돌아 가자니 너무 힘겨운...

오늘 친정에 전화 한번 돌려야 겠습니다.

그럼...

 

편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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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박샘
  • |
  • 2009-12-27 11:09
서정시인 어머님도 우리 어머님 못지 않으셨네.
아니 더 열혈 학부형이셨네요.
다 감사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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