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엄마, 방년 일흔여섯이십니다.
삼십대 중반에 연립주택을 50채씩 지었던 여장부시죠.
그에 반해 초등학교 선생이셨던 제 아빠는 샌님입니다.
신사임당과 임꺽정의 조합, 참 괜찮죠잉?
문제는 아버지가 신씨고 엄마가 임씨입니다.


저희들 공부하는 동안 울 엄마는 가락지 하나 못 끼셨습니다.
가락지 하나면 참고서가 몇 권인데 그런 걸 사느냐고요.
집을 척척 지으시니까 늘 신사옥(?)에서는 살았는데
보일러 기름 아끼느라 보일러 스위치 올렸다 바로 꺼서
전 한국의 겨울이 매섭다는 걸 잘 압니다.
아, 징그러운 절약 정신.
인사동에 수예점을 운영하신 적이 있었는데
퇴근하고 오시면 아무리 늦어도 집에 와서 저녁을 드셔요.
혼자서 식당밥을 드시는 건 상상도 못 하죠.
저만 그랬나요? 김밥은 소풍 때만, 자장면은 생일에만.
종종 늦으셨어요.
늦어도 안 오시는 엄마를 기다려 버스 정류장에 나가면
구척장신 중년여성이 무언가에 골몰한 표정을 짓고 버스에서 내리다
저와 동생을 보고 한 번 슬쩍 웃으십니다. (제가 엄마 닮아서 큽니다.)
골몰한 이유는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에 관한 겁니다.
제 엄마는 원래 거부장자의 자손이셨어요.
외할아버지가 구한 말 마지막 정승 중 한분이시고
할아버지는 XX도 큰 사업가로 여성 교육에도 일찍 눈을 뜨셔서
여학교를 지으신 분이어요.
구한 말 양반/부자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시대극에 나오는 생활 묘사를 보시면 '저거 다 틀렸다'고 하십니다.
그런 여자가 어쩌다 임꺽순이 되었을꼬?
6.25 동란이 원인입니다.
거기까지만 말씀드리죠. 비극사가 있으니까요.
여차여차해서 초등선생이 된 엄마가 거기서 사임당과 눈이 맞습니다.
오빠 낳고 선생을 관두고부터 돈벌이에 혈안이 되십니다.
중간의 삶 생략
이 할매가 요즘 일이 없으십니다.
자식들 다 독립하고 아둥바둥 안 사셔도 됩니다.
제목 기억나시죠? 홈쇼핑 할매가 바로 임꺽정입니다.
몸이 아프셔서, 특히 겨울에는 밖에 못 나가셔요.
부모님 댁의 모든 것은 그래서 TV에서 나옵니다.
냉장고, 소파에서부터 두 켤레 얼마하는 신발, 젊은 사람이나 들 가방,
게다가 갈비, 조기 다 갖다줍니다.
화면이 커서 멸치는 조기로, 잔 새우는 가재로 확대됩니다.
쇼호트스라는 여자들의 언변은 기가 막히지요.
그거 틀어놓으면 심심하지 않으시대요.
어디나 전화만 걸어도 '아무개씨시죠?"하면 반색한다네요.
우리 식구들은 그런 할매를 신기해합니다.
그렇게 돈 안 쓰고, 재미란 모르던 사람이
쇼핑에 재미를 붙이셨으니 말이죠.
그러니까 젊을 때의 고생을 참고 참으면
편안한 노후가 오나봅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니 이제사 즐거운 세상이 되는 건 아닙니다.
안 돌아다녀도 필요한(?) 물건 구입하고
눈과 귀를 심심치 않게 하는 홈쇼핑이 전 요즘 고맙네요.
이번 주에는 또 뭘 사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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