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갑질을 하는 재벌가의 행동과
비굴함과 치욕을 느끼면서도 참을 수 밖에 없었을 사무장을 보면서
'아, 나 그 기분 알아..'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병원에서 의사는 갑이죠. 제가 일한 S병원은 그나마 국내에서는 가장 간호사의 위치가 보장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장에서부터 그 아래 임뭔들이 모두 의사이니 의사가 갑일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요.
그날 저는 야간근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한 밤 중인데 갑자기 욕설이 들리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책임간호사였던 저는 (밤에는 수간호사가 없기 때문에 책임 간호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빛의 속도로 달려갔지요. 중환자실 한 가운에데서 덩치가 산 만한 신경외과 의사가 욕을 하며 환자 앞에 앉아있는 겁니다. 요추천자 (척추에서 척수액을 빼내는 검사)를 하던 중에 간호사가 와서 도와주지 않는다며 씩씩대더니 벌떡 일어나 검사에 쓰던 도구를 패댕이치고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차면서 순식간에 병동이 공포의 장소로 변했습니다.
환자는 겁에 질려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 자기 검사가 잘못 된 거냐 불안해 하고 말입니다.
선생님, 왜 그러시느냐.. 환자분이 놀라실 거 같으니 진정하시라.. 말하니 자기가 검사를 끝낼 때까지 간호사가 오지 않았다면서 욕설을 날리더군요.
담당 간호사가 놀란 토끼 얼굴로 옆에 와서 섭니다.
왜 도와주지 않았냐 물으니 검사를 하는 줄 몰랐고 도와달라는 말을 듣지도 못 했다는 겁니다.
사실 요추천자는 환자 몸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움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처치입니다. 그런데 이 간호사가 한 달 조금 넘은 완전 생신규 간호사였던 데다가 그 순간 다른 환자를 간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던 거지요.
신규 간호사라 못 알아 챈 것은 죄송하다. 아마 선생님이 도와달라 한 마디만 말 했으면 분명히 갔을 테고 본인이 못 했으면 저라도 가서 했을 것이다. 했더니 자기가 일 하고 있으면 알아서 와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X발.. @@ 등등 욕설을 뱉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의사로서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한 두가지 한 것이 아니었죠.
어쩌지... 하고 있는데 본인 입으로 고함을 치더군요. "왜, 대자보에 써서 붙이시지! "
그 자리에서 확인 사살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입으로 지금 대자보에 쓰라고 하셨으니 정말 그렇게 해도 되지요? 알겠습니다." "그래. 올려라, 올려!!"
그 때쯤 병원내에 사내 홈페이지가 생겼고 조금씩 직원들이 그것을 이용해 가던 시기였었지요.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대자보에 쓰나..
사내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사실만을 진솔하게..
아침에 퇴근하자마자 저는 수간호사의 당장 글을 지우라는 불같은 전화를 받게 됩니다.
신경외과 병동에서 간호사들이 그 글을 출력하여 붙여놓았고, 신경외과 의사들은 회의에 돌입하게 되고 난리가 난 거지요.
수간호사는 어쩔거냐며 신경질을 내기 시작합니다.
잘못한 사람이 누구인지.. 반성을 하고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지요. 간호사의 위치와 권리를 보장해주려 노력해야 하는 수간호사마저 자신의 밥줄과 성공이 누구의 손에 달려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이 그 사건의 주안점인 듯..
우선은 형식적인 회의를 가졌습니다.
신경외과 과장님 이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모인 사리에서 저는 그 의사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저도 사과문을 올릴 수 있겠다고 했고, 과장님은 해당 의사에게 사과 할 것을 요구하셨지요. 그 앞에서 그 의사는 간호사에게 사과를 하겠다고 대답했고, 그래서 저도 그럼 저도 사과문을 올리겠다 결론을 내렸지요.
그러나 문을 나서고 과장님이 가시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 날 신규 간호사라며 저에게는 사과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욕을 들은 것도 저고 패댕이를 친 것도 제 앞에서 한 행동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다면 저의 사과문도 없을 것이라 했고 그 날로부터 거의 2주간 날마다, 매 근무 시간마다...
저는 신경외과 의사들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게시판에 사과 글을 올리라는 것이지요. 그것도 자신들이 적어준 그대로... 조를 짜서 한번에 서너명씩 몰려옵니다.
아무도 제 편이 되어주지 않았고 힘없는 동료 간호사들은 응원만 할 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요.
더욱 치사한 것은 정작 당사자는 한 번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본인더러 와서 내 얼굴 똑바로 보고 이야기 하라 말해도 윗년차 의사들만을 보내는 조직적인 깡패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주간을 시달린 뒤 ... (저도 참 독하지요?) 이미 신경외과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게되고, 너 땜에 우리가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선배들의 질타를 저만큼 힘들게 그 의사가 겪게 되었을 즈음 저의 싱거운 사과문으로 이 사건은 끝을 내게 됩니다.
...........................................(그들이 적어준 것을 쓰고) 라고 사과하기를 원하므로 사과글을 올립니다... 하고.
한마디로 코메디를 한 거지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던 나이라 저도 깡이 있었나봅니다.
그렇지만 그들로부터 당한 인간적인 모욕감과 수간호사의 방관 등 2주간의 시간은 제아무리 당당해지자. 비굴해지지 말자. 다짐을 해도 두렵고 막막하고 무서웠습니다.
일은 잘 하지만 승진을 시켜줄 수 없다는 수간호사의 뒷담화도 적성에 맞지만 결국 간호사직에 미련을 갖지 않게 한 한가지 요인 중에 하나이지요.
그 때 있었던 모든 신경외과 의사가 다 똑같은 마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조별로 움직이니 따라오긴 했지만 차마 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지나가면서 말없이 어깨를 톡톡 도닥여준 사람도 있었고 ..
만약 제 아이가 저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저는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요.
남들과 같은 길을 가고 싶으면 남들이 택했을 행동을 하는 게 맞는 것이겠고..
남의 눈보다는 내 양심의 소리대로 따라 살기를 원하면 승진이나 평가에서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는 것이 맞을까요?
물론 제가 소망하는 것은 양심대로 살면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픈 것이지요.
다른 사람을 지휘하거나 누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나를 만들어 준 것은 보이지 않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라는 것을 망각하면서 귀하지 않은 영혼은 단 하나도 없다는 진리도 모른 채 살다보면 그녀처럼....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무수히 많은 귀한 영혼들에게 삿대질을 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고작 땅콩 한 봉지가 그녀의 삶에 이처럼 큰 회오리를 가져다 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요?
처음 이 기사를 봤을 때부터 줄곧 그녀에게 해 주고픈 문장이 있었습니다.
매직트리 하우스의 잭이 잘 쓰는 말이지요.. ^^
"Are you nuts?" (너 미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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