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쑥 블로그에 써놨던 글 업뎃해서 호구조사에 철처히 응합니다.
(해운여사: 홍박 노인네: 그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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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면부지의 땅에 보따리 하나, 아니 보따리 한 트럭 싣고 내려온 게 어언 20년이다.
내 기필코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결심을 하고 앞 만 보고 살았다.
--만주에 독립운동하러 간 얘기가 아니고,
처음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내려와 살기 시작하던 때 일이다.
조개 따고 미역 잡은 얘기도 아니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지금은 광안대교가 멋지고 고층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지만
당시에는 집은 전부 낡았는데 상가마다 수입품 가게만 즐비한 요상한 동네였다.
기차역과 공항만 보면 신물난다.
지금처럼 KTX가 씽씽 달리는 것도 아니고 서울을 드나들려면
새마을호를 타고 하염없이 달리거나 일이 좀 급하면 뱅기를 타야했으니.
내가 박사과정을 막 입학한 뒤여서 처음에는 남편만 부산으로 갔다.
작은 아파트에 살 길을 마련해주고 나는 친정으로 짐 싸서 들어가는 생이별을 했다.
기차역에서 헤어지면서 울면서 돌아섰다는 전설이......
(남편하고 일주일 헤어진다고 울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코메디 중의 코메디.)
1년후 나도 완전 부산으로 내려왔다.
박사과정 한 학기 남기고 기다리던 아기가 생겼는데 그 때부터 험난한 공부여정이 시작.
너무 오래 기다렸던 임신인지라 서울을 드나드는 건 무리였다.
할 수 없이 휴학하고 출산 후 남은 공부를 하는데, 에효, 기억조차 싫다.
논문, 시험, 발표....서울로 미국으로 애기를 매달고 싸돌아다녔다.
지금은 도저히 못 부린다, 그 극성.
미국 얘기. 박사후과정을 할 때 아이가 1학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 깨워 아침 먹여 학교에 실어다주고
나는 시간 아끼려 일찍 장을 봐 장거리를 들고 일하는 초등학교로 갔다.
그 곳 냉장고에 장 본 물건을 넣어두고 5시간 일을 했다.
퇴근하면서 장 본 물건 들고, 아이 학교에 들러 데리고 나왔다.
저녁을 먹기 전 아이를 데리고 수영, 피아노, 축구, 농구....교실로.
그 다음 나는 수업 준비를 했다.
4일 가르치고, 하루는 내 수업을 들었으니 어떤 날은 가르치는 수업, 어떤 날은 내 숙제.
자주 밤을 샜다. 그 와중에 개인적으로 미국 교사시험 준비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침에 간단히 토스트 한 조각 먹일 걸.
점심도 시원찮게 먹는다는 생각에 저녁에 미리 준비해놓은 아침밥을 꼭 먹였다.
그냥 스쿨버스를 태워보낼 걸.
그러려면 아이가 한 20분은 일찍 일어나야 된다. 좀 더 재우려고 그랬다.
음악이다 운동이다 소질이 하나도 없는데 그런 데 시간과 돈 낭비말 걸.
누가 그럴 줄 알았나? 뭐래도 하나는 건질(?) 줄 알았지.
이렇게 사는 과정이 추억인가보다.
이를 통해 내가 목표했던 것을 이루었느냐? 대답은 '글쎄요'다.
왜냐면 지금도 끊임 없이 잘 안될 일을 계산하고 실망하고
그러니 목표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목표를 이루면 만족스러워야 되는 거 아닌가?
내 자신에 관한 족쇄는 좀 벗었다. 이 나이까지 못 이루었으면 관두자는 생각이다.
그런데 아이에 관해서는 여전히 엉토당토 않을 걸 기대했다 속상해 하는 우행을 계속한다.
얘기가 옆으로 한 참 샜는데, 난 이제 서울도 미국도 싫다.
광안리 떠나 해운대 온지도 벌써 13 여년.
대체로 미국과 서울에 있었지만 어쨋든 주소지 부산 20년.
-그 사이 해외 이사를 세 번이나 했으니...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귀여운 사투리가 난무하는 부산 해운대가 좋다.
맘만 먹으면 바다 보면 차 마시고, 심심하면 노인네랑 수영강변 산책하고,
더 심심하면 노인네랑 장산에 올라간다.
백화점 걸어서 5분 - 노인네 식사 해결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은퇴하고도 서울 안 갈란다. 생면부지 부산에서 늙어 죽을란다.
부산 예찬, 해운대 예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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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바톤은 제이맘.
당신은 어쩌다가 그 곳에서 살게 되셨나요?
그대 쓰시고 릴레이 바톤 딴 사람에게 넘기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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